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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강 『흰』 리뷰│존재와 부재, 흰 빛으로 짜여진 문학적 성찰

by 리북이 2025. 9. 23.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강소설 흰 책표지

한강의 소설 『흰』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언니의 부재를 흰색 사물들을 통해 소환하며, 존재와 소멸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시적 언어와 파편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언어가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을 여백과 상징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을 생각하게 합니다.

흰 사물로 시작된 기억의 문학

『흰』은 한강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언니의 존재는 가족들에게조차 충분히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언니를 잊지 않기 위해 글쓰기를 택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언니의 생애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흰색 사물들을 불러내어 언니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눈, 소금, 쌀, 수의, 속옷, 치마, 달빛과 같은 사물들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데, 이는 물건의 나열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불러내는 기호이자 상징을 뜻합니다. 작품의 형식은 전통적인 서사와 다릅니다. 인물, 사건, 갈등의 구조가 중심이 아니라 파편화된 단상과 이미지들이 이어져 마치 시집을 읽는 듯한 감각을 줍니다. 이 파편성은 곧 상실의 경험을 상징합니다. 죽음을 겪은 기억은 명확히 정리되지 않고 흩어지며, 시간과 함께 희미해집니다. 『흰』은 이러한 기억의 조각들을 언어로 붙잡고자 하며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비극을 오히려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며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흰색'이라는 색채는 단순히 순결과 무구함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탄생의 색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감싸는 색이며,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는 색입니다. 수의의 흰빛은 죽음을 감싸고 쌀의 흰빛은 생명을 이어주며 눈의 흰빛은 차갑고 덧없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언니의 부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는 이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흰색을 매개로 삼았습니다. 『흰』의 첫 장을 열면 사물의 이름이 불려 나오는 순간마다 그 안에 담긴 무게와 공기를 느낍니다. 한강은 사물의 촉감, 색채, 빛의 농도를 언어로 번역하며, 언니의 삶이 짧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이는 문학이 부재를 존재로 바꾸려는 가장 치열한 시도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시적 언어와 여백의 미학

한강의 작품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으로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흰』에서 보여주는 언어의 방식은 한층 더 시적이고 압축적입니다. 이 작품은 산문이면서도 동시에 시집에 가깝습니다. 문장은 길지 않으며 필요 없는 수식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대신 단어 하나하나에 농축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짧은 문장 사이에 놓인 공백을 읽어야 하며, 그 공백 속에서 비로소 부재의 무게를 체감합니다. 여백의 미학은 이 작품을 읽는 중요한 경험입니다. 서사의 공백은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내도록 합니다. 직접 상실을 떠올리고 사라진 존재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는 문학이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각과 체험을 열어주는 통로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흰』은 한국어로 쓰였지만 번역을 전제로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한강은 이미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로서 셰계의 여러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씁니다. 『흰』은 한국적 정서를 기반으로 하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백을 남겨 둠으로써 문화적 차이를 초월한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흰색이라는 색은 보편적이기에 어느 언어로 번역되더라도 그 상징성이 비슷하여 누구나 개인적인 경험을 투사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흰 사물은 매번 새로운 의미로 바뀝니다. 눈은 차갑지만 순결하며 소금은 고통과 치유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쌀은 생명을 이어주고 수의는 죽음을 감싸며 속옷과 치마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가리면서도 보호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흰색은 시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감각, 기억, 감정이 중첩된 여러 층의 기호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흰』은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는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부재를 언어로 말함으로써 문학은 오히려 부재 자체를 증명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여백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상실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치유와 성찰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존재와 부재, 그리고 문학의 역할

『흰』이 특별한 이유는 개인적인 비극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보편적 성찰로 확장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사라진 언니는 가족의 기억 속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작가의 글쓰기 속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언어로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을 불러내는 이 시도는 문학이 가진 힘을 보여줍니다. 문학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부재를 감각하게 합니다. 『흰』은 언어가 가진 이러한 힘을 크게 보여줍니다. 글을 읽으면서 사라진 존재가 언어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는 애도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잃어버린 가족, 기억 속에만 남은 존재들, 혹은 마음속 깊이 묻어둔 아픔들이 언어의 힘에 의해 드러납니다. 『흰』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세계 문학 무대에서 『흰』이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강은 한국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한 단계 더 끌어올립니다. 『흰』은 존재와 부재를 탐구하는 철학적 작품이자 동시에 상실을 견디는 인간의 보편적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자리합니다. 비평가들은 『흰』을 두고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습니다. 이는 한강 문학의 핵심이자 이 작품이 지닌 독창적인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흰』을 통해 문학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흰』은 한 개인의 비극적 기억을 기록한 소설이 아닙니다. 이는 사라진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문학적 실험이자, 언어와 기억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짧은 문장과 흰색 사물의 상징 속에서 우리는 부재를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자신의 삶 속에서 흰 사물들을 떠올리며 문학이 선사하는 생각의 깊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흰』은 우리 모두에게 언어와 기억, 존재와 부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덧붙여진 글

한강 작가는 『흰』을 처음 출간한 2016년 당시에는 “이 책 전체가 작가의 말”이라며  '작가의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년 후 개정판에는 '작가의 말'이 덧붙여집니다. 그 글에서『흰』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집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작가는 항쟁박물관에서 보았던 바르샤바가 흰 눈으로 덮인 사진 한 장에 대해 언급하며 짧은 문단 속에 역사와 기억, 폭력과 침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짧은 글 한 편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침묵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것이 『흰』 전편을 관통하는 정서임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첫 책으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읽게 되었을 때 그 안에 축적된 사유와 시선, 그리고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더욱 깊이 느껴졌습니다. 한강의 『흰』은 그렇게 매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네오는 살아 있는 책입니다.

결론│『흰』이 건네는 존재의 온도

한강의 『흰』은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여백과 사물의 상징으로 끌어올린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서사를 넘어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문학적 질문을 던지며 삶의 가장 조용한 부분과 마주하게 만듭니다. 이 책은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하지만 특히 다음 같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문학을 통해 위로받고 싶은 분
  • 문학적 실험과 시적인 산문을 좋아하는 분
  • 한강 작가의 세계관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분
  • 마음이 고요해지는 문장을 찾는 분

『흰』은 ‘사라진 존재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한 작가의 정직한 응답입니다. 흰색 사물에 담긴 기억, 슬픔, 그리고 희망의 단상들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습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흰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 안에 담긴 숨결과 여운을 통해, 비로소 문학이 전하는 존재의 온도를 느끼게 됩니다.